2020년 공쿠르상을 받은 에르베 르 텔리에의 소설 『아노말리』는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청부살인업자, 소설가, 변호사, 가수 등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인물이 차례로 등장한다. 첫 이야기가 청부살인업자의 이야기라 범죄소설인 줄 알았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읽는 동안 계속 궁금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이 소설이 묻는 것은 범인을 찾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날 나와 똑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 아래에는 주요 사건과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아노말리』 줄거리|똑같은 비행기가 두 번 도착하다
2021년 3월, 파리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심한 난기류를 통과한 뒤 착륙한다. 승객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6월에 똑같은 비행기가 같은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다시 나타난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석 달을 건너뛰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미국 정부는 승객들을 격리하고 과학자와 종교인까지 불러 이 사건을 조사한다. 현실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른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하지만 내가 더 궁금했던 것은 비행기가 왜 두 번 나타났는가보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다.
3월에 도착한 사람들에게는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누군가는 병을 알게 되었으며,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 반면 6월에 도착한 사람들은 그 석 달을 살아 보지 못했다. 같은 과거를 가졌지만 이제 두 사람의 현재는 다르다.
👥 분신을 만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선택
등장인물들의 선택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청부살인업자 블레이크는 또 다른 자신을 위협으로 여기고 없애 버린다. 그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나누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어린 소피아에게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또 다른 자신이 나타나면서 혼자 감당해 온 피해를 드러낼 길이 열린다. 누군가에게 분신은 위험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셈이다.
가수 슬림보이는 분신과 함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고, 변호사 조애나는 이미 다른 자신이 살고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 새 삶을 찾는다. 뤼시와 앙드레의 관계를 보면서는 사람이나 사랑을 물건처럼 반씩 나눌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가 빅토르 미젤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3월의 미젤은 소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지만 6월의 미젤은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똑같은 출발점에 있던 두 사람의 운명이 석 달 사이에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같은 사건을 겪었는데도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양보하고, 누군가는 제거한다. 정답은 없었다. 오히려 그 선택들이 인물의 성격과 욕망을 더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 또 다른 나는 나를 너무 잘 안다는 두려움
그런데 읽으면서 가장 의아했던 점은 많은 등장인물이 분신의 존재를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아마 두려웠을 것 같다.
내가 또 다른 나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도 나를 똑같이 안다는 뜻이다. 남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나 부끄러운 기억, 혼자만 품었던 마음까지 모두 알고 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하는지, 무엇에 상처받는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보다 더 불안한 것은 그 사람이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 가족을 알고, 내 친구와 추억을 공유하고, 나와 똑같은 얼굴로 내 삶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선뜻 그를 환영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미워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는 나이기 때문이다.
🌿 같았던 두 사람은 언제부터 달라질까?
2024년 이 책을 읽고 남긴 기록에 이런 생각을 적었다.
'그들이 함께 나누지 못한 시간이 나와 분신 사이에 다름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지금 다시 읽어도 이 문장에 마음이 간다. 똑같은 기억에서 출발했어도 석 달 동안 겪은 일이 달랐고, 서로를 만난 뒤에는 선택마저 달라졌다. 그렇다면 사람을 나답게 만드는 것은 과거의 기억일까, 아니면 오늘의 선택일까?
더 흥미로운 것은 또 다른 내가 나보다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내가 포기한 일을 해내고, 내가 놓친 관계를 지키고, 나보다 행복하게 산다면 마냥 기뻐할 수 있을까. 분신의 존재는 단순히 경쟁자가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 『아노말리』 결말을 읽고
소설은 이 기묘한 사건에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다. 또다시 비행기가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글자마저 무너지는 듯한 낯선 방식으로 끝난다. 이 세계가 진짜인지, 누군가 만든 이야기인지까지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오래 남은 것은 과학적 설명이 아니었다. 분신을 만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지키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또 다른 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나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유일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섭다.
『아노말리』는 기발한 설정의 SF 소설이지만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어도 우리는 각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이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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