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아주 오래전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 소설을 그저 기묘하고 무서운 재난소설 정도로 읽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고,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는 설정 자체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줄거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가 궁금했다면,
이번에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은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정말 눈을 뜨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 갑자기 시작된 ‘백색 실명’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남자가 운전을 하던 중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실명과 조금 다르다.
그의 눈앞은 검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보인다.
마치 우유 같은 빛 속에 갇힌 듯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더 기이한 것은 이 실명이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같은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백색 실명’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정부는 사태를 통제하기 위해 눈먼 사람들을 격리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소설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질서가 하나씩 무너지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아주 낯선 상황에 던져진다.
다만 이 글에서는 결말이나 중요한 사건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를 미리 알고 읽는 것보다,
상황이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을 직접 따라가며 읽을 때 훨씬 강하게 다가오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 눈이 보이지 않으면 사람은 달라질까?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전염병이었다.
의사조차 이 실명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읽다 보면 우리가 실제로 겪었던 여러 감염병과 사회적 혼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질병 자체가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눈먼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이름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다.
사회는 그들을 보호하기보다 격리하고 통제하는 쪽을 선택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꽤 오래 멈추어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무례는 정말이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들은 눈먼 사람들을 여전히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걸까?
상대가 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왜 사람을 이렇게 쉽게 잔인하게 만들까.
누군가 보고 있을 때는 하지 못할 행동을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에서 가장 두려웠다.
📖 나만 눈이 보이는 세상이라면 행복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한동안 이런 상상을 했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눈이 멀었는데 나만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꽤 편할 것 같기도 하다.
필요한 물건을 먼저 찾을 수도 있고, 먹을 것을 구하는 데도 유리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고,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지금보다 자유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른 문제가 생긴다.
내가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쉽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능력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빼앗고 싶은 능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상황이라면 그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공포가 될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도 ‘보는 사람’의 위치는 단순히 특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모두 목격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비겁함도 보고, 추악함도 보고, 고통도 본다.
어쩌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 더 큰 책임을 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권력’이었다
사람들이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권력은 생긴다.
먹을 것이든 정보든 힘이든, 누군가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
평소라면 사회의 법과 제도가 그런 행동을 어느 정도 막아준다.
하지만 질서가 사라지고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면 사람의 본성은 어떻게 변할까?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 질문을 아주 불편하게 밀어붙인다.
나는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이 정도까지 한다고?’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권력은 꼭 거창한 자리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순간에도 생길 수 있다.
먹을 것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정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
이 아주 작은 차이가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 되는 순간, 인간은 얼마나 쉽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은 보여준다.
📖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눈먼 사람들의 도시를 읽다 보면 실명은 단순히 ‘시력을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보지 않는다.
나와 직접 관계없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고, 불편한 현실은 모르는 척하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세상을 꽤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 사람들과 우리는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눈이 멀지는 않았지만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눈멂 아닐까.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본다’는 말의 의미를 계속 생각하게 됐다.
눈에 들어오는 것과 제대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 예전에 읽었을 때와 지금 읽었을 때 다른 소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에는 사람이 무서웠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사람이 무섭다기보다 상황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지가 더 무서웠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먹을 것이 사라지고, 안전이 사라지고, 법이 사라지고,
아무도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지 않는 상황이 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나쁜 인간들’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질문하는 소설에 가깝다.
당신은 그 상황에서도 지금과 같은 사람일 수 있습니까?
아마 이것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 『눈먼 자들의 도시』는 재난소설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전염병처럼 퍼지는 실명 때문에 재난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이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눈이 멀어버린 도시’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질서가 사라졌을 때 인간은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가.
타인을 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군가 끝까지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들이 『눈먼 자들의 도시』를 단순한 디스토피아 소설 이상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의사의 아내를 생각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과연 행운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추악함까지 모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던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차라리 보지 못했다면 견디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보아야 한다.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고, 누군가는 타인을 사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서 ‘보는 것’이 단순한 시력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태도처럼 느껴졌다.
📖 책을 덮고 남은 질문
『눈먼 자들의 도시』를 다 읽고 나면 편안하게 책을 덮기는 어렵다.
사람의 이기심과 욕망, 권력의 잔인함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책을 완전히 절망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바라보려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눈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사람의 고통까지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그리고 책 속의 한 문장처럼,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어 있었고 지금도 눈이 먼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눈을 잃는다는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예전에는 무서운 소설로 기억했다.
지금 다시 읽고 나니 질문이 많은 소설로 남았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애써 보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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