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분명 큰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별일 없는 날들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 반복이 쌓일수록 점점 더 불안해졌다. 주인공 드로고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드로고가 바스티아니 요새로 향할 때만 해도 나는 그곳이 그의 인생에서 잠깐 거쳐 가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드로고 역시 그랬다. 요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생활은 단조로웠다.
북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타타르인의 사막이 있었지만 정작 적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드로고는 쉽게 떠나지 못한다.
처음에는 떠날 수 있었고, 떠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요새의 생활은 점점 익숙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드로고에게 요새는 답답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떠나기 어려운 공간이 된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사람은 정말 싫은 곳에서만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싫어서가 아니라 익숙해서 떠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 익숙함은 생각보다 강하다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드로고가 요새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지루했던 일상이 어느 순간 그의 생활이 된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특별한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단조로움 때문에 오히려 변화가 두려워진다.
드로고는 요새의 삶이 자신이 바라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막상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삶으로 나아가려 하니 불안해진다.
이 부분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끔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꾼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싶기도 하고,
익숙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막상 변화가 눈앞에 오면 여러 이유를 만들며 뒤로 물러설 때가 있다.
지금이 완전히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다.
익숙한 불만이 낯선 가능성보다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로고를 보면서 답답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모습을 쉽게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도 어쩌면 각자의 요새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견디는 일
요새의 군인들은 타타르인의 침입을 기다린다.
그들에게 전쟁은 단순한 위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군인으로서 살아온 시간을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특히 드로고에게 전쟁은 점점 더 특별한 의미가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요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는 언젠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 줄 커다란 사건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해질녘 드로고는 때때로 환상적인 영웅담을 떠올린다. 적군이 몰려오고 자신이 용감하게 싸우며,
지금까지의 기다림이 마침내 의미를 얻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는 이 장면이 참 쓸쓸했다.
드로고가 원하는 것은 전쟁 그 자체라기보다 자신의 삶이 특별했다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우리도 비슷하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돈을 더 벌면,
원하는 일을 시작하면,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시간이 생기면,
어떤 목표를 이루면.
그때부터 진짜 삶이 시작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타타르인의 사막』은 아주 조용하게 묻는다.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흘러가는 오늘은 내 삶이 아닌가?
📖 희망은 언제나 좋은 것일까
보통 우리는 희망을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하고,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희망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희망에도 다른 얼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드로고에게 타타르인의 침입은 희망이었다.
언젠가 적군이 나타나면 자신이 요새에서 보낸 시간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희망 때문에 그는 요새를 지켰다.
하지만 동시에 그 희망 때문에 주변의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희망이 너무 커지면 현재는 자꾸 준비 기간이 된다.
오늘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 되고,
지금의 삶은 언젠가 찾아올 중요한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이 된다.
그러다 보면 정작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한 하루를 놓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조금 뜨끔했다.
나 역시 무언가를 기다리며 현재를 미뤄 둔 적이 많기 때문이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해야지.
상황이 좋아지면 시작해야지.
준비가 다 되면 움직여야지.
하지만 완벽한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준비가 끝난 뒤에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이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오르티스 소령이 보여 준 또 다른 삶
드로고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인물도 있다.
오르티스 소령은 은퇴한 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처음 드로고는 그런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요새에서 적군을 기다리고 전쟁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삶과 비교하면 너무 평범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르티스는 요새에서 벗어난 뒤 주어진 생활에 맞춰 살아간다.
거창한 영광이나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다.
나는 이 부분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졌다.
사람은 대부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눈에 띄는 성취를 이루고 싶고,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의미가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극적인 사건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실패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사막’이 의미하는 것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목에 등장하는 ‘사막’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사막은 적군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장소다.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기도 하다.
드로고는 매일 사막을 바라본다.
언젠가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나에게 이 사막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좋은 일이 오기를 기대한다. 때로는 그 기대 때문에 현재를 견딘다.
하지만 사막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기다린다고 반드시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사막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가 아니라, 사막을 바라보며 보내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아닐까.
📖 드로고의 마지막이 더 쓸쓸했던 이유
결국 전쟁의 순간은 찾아온다.
드로고가 평생 기다렸던 바로 그 순간이다.
하지만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 드로고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평생 기다렸던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는 그것을 잡지 못한다.
처음에는 너무 허무했다.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드로고가 억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 생각해 보니 이 결말이야말로 소설 전체를 가장 잘 보여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우리가 원하는 순간에 맞춰 움직여 주지 않는다.
내가 준비됐다고 사건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오래 기다렸다고 반드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다림 자체를 삶의 목표로 만들어 버리면 위험하다.
📖 인생의 큰 전환점은 언제 올지 모른다
책의 마지막에서 드로고를 바라보며 처음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드로고가 너무 답답했다.
왜 떠나지 못하지?
왜 저렇게 기다리기만 하지?
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꾸지 못하지?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드로고는 특별히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와 꽤 닮아 있었다.
사람은 익숙한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가 두렵고,
희망을 가지면서도 그 희망 때문에 현재를 놓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고 나서는 ‘더 특별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단조로운 삶도 결국 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해야 할 일을 하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고,
피곤한 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우리는 자꾸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인생은 특별한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별일 없는 날들 속에 더 많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 『타타르인의 사막』을 덮고
『타타르인의 사막』은 화려한 사건으로 끌고 가는 소설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하고 느리다.
그래서 읽는 동안 답답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니 드로고의 시간이 자꾸 생각났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다림 때문에 지금의 삶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희망은 필요하다.
목표도 필요하다.
하지만 미래의 어떤 순간이 지금의 삶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는다.
드로고가 바라보던 사막처럼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곳에서 내가 바라던 일이 나타날 수도 있고, 끝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직 오지 않은 삶을 기다리느라 지금의 삶을 놓치지 않는 것.
『타타르인의 사막』은 나에게 결국 이런 질문을 남겼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언젠가 시작될 삶을 기다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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