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시』, 우리 안의 베르나르댕씨를 마주하다

▍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최근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라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인데도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보통 그 사람을 이상하다고 규정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쪽은 상대가 아니라,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나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시』(원제: Les Catilinaires, 1997)는
바로 이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는 소설이다.
은퇴 후 조용한 시골집에서 완벽한 노년을 계획했던 부부에게,
매일 오후 네 시마다 찾아와 두 시간씩 말없이 앉아 있다 가는 이웃이 생긴다면 어떨까.
이 짧고 기묘한 설정 하나로, 노통브는 인간관계와 자아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끌어낸다.
육아나 인간관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남 이야기처럼 읽히지 않을 것이다.
▍ 매일 오후 네 시, 찾아오는 이웃
의사 출신인 에밀과 그의 아내 쥘리에트는 은퇴 후 한적한 시골 마을에 꿈에 그리던 집을 마련한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둘만의 평화를 누리려던 참, 유일한 이웃인 팔라멘드 베르나르댕이 찾아온다.
그는 매일 오후 네 시 정각에 방문해 정확히 두 시간 동안 소파에 앉아 있다가 돌아간다.
대화는 거의 없다. 에밀은 처음엔 예의상, 나중엔 거의 강박적으로 그에게 말을 걸며 침묵을 메우려 하지만,
베르나르댕은 시종일관 무표정하고 무응답에 가깝다.
부부는 점점 이 방문의 의미와 베르나르댕이라는 인물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평화로운 노후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한다.
▍ 베르나르댕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을까
이 소설을 다 읽고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베르나르댕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그리고 에밀)가 그의 침묵을 견디지 못해 만들어낸 괴물이었을까.
에밀은 베르나르댕을 향해 끊임없이 판단을 쏟아낸다.
그를 무기력하고 지루하고 심지어 기괴한 존재로 규정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방문을 거부하지 못한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나르댕의 존재에 집착하고,
그가 오지 않는 날에는 불안해한다. 이 모순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밀어내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다.
어쩌면 베르나르댕이 진짜 괴이한 것이 아니라,
그를 견디지 못하고 계속 의미를 부여하려는 에밀의 태도 자체가 더 병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부부가 베르나르댕의 아내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베르나르댕 부인을 만나면서 은연중에 그녀를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표면적으로는 예의를 갖추지만, 그 밑에는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 깔려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것이 소설 속 특별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저지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는 사람,
사회적으로 능숙하지 못한 사람을 마주할 때
우리는 손쉽게 그들을 '모자란 사람'으로 규정해버린다.
반면 베르나르댕은 누구도 비웃거나 얕보지 않는다. 오히려 판단하고 재단하는 쪽은 언제나 에밀과 쥘리에트다.
▍ 내 안의 또 다른 나, 베르나르댕
소설을 읽다 보니 베르나르댕은 단순히 이상한 이웃이 아니라,
에밀이 애써 외면하고 억눌러온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밀은 소설 속에서 스스로 자기 안에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으며,
그 자신은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 행동을 기꺼워했다고 고백하는 대목을 지나간다.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 성찰이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드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베르나르댕이라는 인물이 실재하는 이웃이면서도 동시에,
에밀이 평생 억눌러온 무기력하고 무표정한 자아의 투영처럼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은퇴 후 완벽하게 통제된 삶을 꾸리려 했던 에밀에게,
아무 말 없이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베르나르댕은 가장 두려운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채우고 정리하고 통제하려는 삶의 이면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고 싶은 또 다른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이 동화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해 블랙 코미디를 거쳐 결국
스산한 괴담처럼 끝나는 구조도 이 해석과 맞닿아 있다.
처음엔 유쾌한 해프닝처럼 보이던 이웃과의 관계가,
실은 인간이 자기 안의 낯선 자아를 감당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파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무섭다기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슬프지도 웃기지도 않은데 눈물이 났던 이유를 곱씹어보면,
베르나르댕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가 억누르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누가 진짜 상대를 힘들게 했을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보면, 이 소설이 흥미로운 지점은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를 계속 뒤집는다는 데 있다.
처음 읽을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베르나르댕이 부부의 평화를 침범하는 가해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 정작 상대를 소진시키는 쪽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의미를 부여하고,
판단을 내리는 에밀 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베르나르댕은 그저 존재할 뿐인데, 그 존재만으로도 에밀의 내면은 무너져 내린다.
이 전복이야말로 노통브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를 갉아먹는 것은 상대방의 침묵이 아니라,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해석하려는 우리 자신의 강박일 수 있다는 것이다.
▍ 관계의 문제일까, 나의 조급함일까
이 지점에서 나는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늘 그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문제는 관계 자체가 아니라 침묵을 못 견디는 나의 조급함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은 은퇴 후 완벽하게 정돈된 삶,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평화로운 삶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는 베르나르댕이라는 외부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그 침묵 앞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완벽하게 설계된 삶일수록 예측 불가능한 것 앞에서 더 쉽게 부서진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조용한 이웃 하나로 보여준다.
▍ 변한 사람은 베르나르댕이 아니었다
결국 베르나르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언제나 그를 바라보는 에밀과 쥘리에트의 시선과 마음이다.
이 비대칭이 소설을 더 서늘하게 만든다.
상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 상대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우리 모두 마음 한구석에 그런 침묵하는 자아를,
혹은 그런 침묵하는 자아를 견디지 못하는 조급함을 하나쯤 데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안고 책장을 덮게 되는 소설이다.
▍ 『오후 네시』를 읽고 생각해볼 질문
-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알아가려 하는가 아니면 손쉽게 판단하고 거리를 두는가.
- 에밀이 베르나르댕에게 느낀 집착은 관심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 내 안에도 베르나르댕처럼 침묵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오후 네시』는 짧고 단순한 구성 안에 인간관계, 침묵, 자아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아낸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을 느껴본 사람,
혹은 '나답지 않은 나'를 문득 발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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