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가 출신 작가 백희성의 두 번째 장편소설 『기억의 무늬』를 완독했다.
전작 『빛이 이끄는 곳으로』로 1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그가,
이번에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감각과 촉감이라는 도구로 풀어낸 작품이다.
읽는 내내 손끝으로 밑줄을 긋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이 소설을 작가 소개, 줄거리, 그리고 나의 감상 순서로 정리해 본다.

📖 건축가에서 소설가로, 백희성
백희성은 명지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발드센건축학교를 졸업하고,
말라케건축학교에서 건축사 과정을 마친 건축가다. 아시아인 최초로 프랑스의 권위 있는 젊은건축가상인
폴 메이몽 상을 수상했고, '빛의 건축가'로 불리는 세계적 건축가 장 누벨의 사무소에서 5년간 디렉터로 활약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한국과 프랑스에 각각 사무소를 둔 KEAB 건축의 대표로, '기억을 담은 건축'을 모티브로
사람들의 추억과 사랑이 스며든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그가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은 2024년, 10년에 걸친 취재와 집필 끝에 완성한 장편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통해서다. 이 작품은 22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고, 건축과 문학을 넘나드는 독특한 시선으로 화제를 모았다.
백희성은 한 인터뷰에서 건축과 문학의 공통점은 결국 '기억'이라는 재료를 다루는 작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건축이 기억을 공간으로 옮기는 일이라면, 문학은 기억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철학은 신작 『기억의 무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 줄거리 - 얼굴 대신 촉감으로 기억하는 여자, 카미
『기억의 무늬』는 프랑스 파리의 패션학교에 다니는 스물두 살의 여성 카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카미는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고 있어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옷의 질감과 향기, 걸음걸이, 그리고 손때 묻은 흔적으로 타인을 기억하며
이 비밀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아간다.
카미에게는 세 살 무렵 목격한 부모의 죽음이라는 어두운 과거가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총으로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그녀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그런데 사건 현장에는 설명되지 않는 제3의 존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실루엣이 있었다.
성인이 된 카미는 이 미제 사건의 수사 재개를 요청하면서 오래전 현장에 있던 낡은 아기 침대에 주목하게 된다.
겉모습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침대에서 하나둘 수상한 흔적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카미의 비밀과 부모님의 사건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친구 뤼미에르가 든든한 조력자로 함께하고,
두 사람은 침대라는 가구에 새겨진 오래된 사연을 따라 실마리를 좇는다.
그 과정에서 카미가 사건 당일 손끝으로 느꼈던 실루엣의 촉감과 아기 침대 사이에 뜻밖의 연결고리가 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19년간 감춰졌던 진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이들이 마주하는 진실은 단순히 '범인이 누구인가'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품고 있다.
소설 속에는 재봉 수업에서 교수가 들려주는 박음질과 실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 대목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두 장의 천을 잇는 것은 결국 실이며, 그 실이 겉으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천을 연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몸에 생긴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되는 과정과도 겹쳐진다.
상처를 낸 원인은 사라져도, 그 시간은 결국 흉터라는 결과 속에 고스란히 남는다는 통찰이다.
📖 내 생각 - 우리는 정말 기억을 잊는 걸까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는 19년 전 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는 정통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이 소설이 진짜로 묻고 있는 것은 '사람의 감각은 어디까지 기억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음악, 촉감, 냄새, 온도처럼 우리는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지만, 몸은 어딘가에 그것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흉터에 관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상처가 생기고 아물어가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시간은 결국 흉터라는 결과 안에 새겨져 있다.
기억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지나간 과정은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결국 지금의 나라는 존재 안에 이미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미가 천 조각의 흔적을 따라 범인을 쫓아가는 과정은 결국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젖은 천에서 문득 따뜻함을 느끼고, 낡은 침대 앞에서 어떤 감각을 떠올리는 장면들을 보면서,
기억이란 하나의 장면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감각을 통해 서로 촘촘히 이어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지점도 있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몇몇 소재들, 예컨대 특정 인물의 울음소리라든지 약과 술을 둘러싼 사연, 그
리고 카미가 특정 인물에게 품었던 생각 등이 결말부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다소 급하게 정리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기억이라는 것의 불완전한 속성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였을까 곱씹어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감각과 기억을 촘촘히 연결한 이 소설의 설정 자체는 정말 흥미로웠다.
모든 서사가 완벽하게 이어졌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오래 남는 질문 하나는 분명했다.
우리는 정말 기억을 잊는 것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무늬처럼 몸과 감각 속에 그것을 계속 품고 살아가는 것일까.
손끝의 감각으로 사랑과 진실을 더듬어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기억의 무늬』는 충분히 곱씹을 만한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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